1) 아홉째천간 壬의 의미
이미 辛金의 부분에서 천지의 이치가 정리가 되어버린 것 처럼 생각이 되었는데, 또다시 무엇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순환불식(循環不息)하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싶다. 계속 돌고도는 흐름의 고리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임수가 또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다. 과연 임수의 역할은 무엇일까?
水氣라는 말로 대신 해야 할 陽水이다. 이러한 성질은 쉬임없이 흘러가는 수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성분으로 생각을 해보자. 이미 금의 질에서 모든 만물은 정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곳을 바탕으로 해서 또다른 무엇이 재창조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임수의 특성이라고 본다. 이것은 다시 선천수라고 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된다. 선천수에서는 一水로 되어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양수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임수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陽水요 一水인 壬水는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의 모체가 되는 성분이라고 이해를 해본다. 그것은 바로 수기인 것이다. 수기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생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수기는 바로 가력한 금기운에서 발산하는 것이다. 금기운에서 정리된 에너지는 다시 재창조의 길을 가게 된다. 원래가 법률이 발생하면 그에 따르는 지켜야 하는 수칙도 자동으로 따라다니게 되어있다. 임수는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서 아홉번째의 천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가 바로 시작이요, 창조요, 출발점인 셈이다. 壬이라고 하는 글자를 빌어서 학문의 제목으로 삼은 것도 있다. 바로 육임학(六壬學)이다. 육임은 여섯 개의 임수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데, 이 의미는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해본다.
그 결과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은 새로운 출발점에서 가장 현명한 길을 찾아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가장 단단하게 뭉쳐버린 신금에서 발생한 임수는 그 결과를 읽어낼 마지막 도구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미를 감잡을 수 있는 글자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임수는 그렇게 새로운 각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이런 의미로써 ‘여섯 개의 임수-六壬’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여섯 개라고 하는 것은 육십갑자에서 나온 것이다. 즉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가 여섯 번 반복을 함으로써 한 갑자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천간은 여섯 번을 반복한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바로 六甲이라고 하는 단어이다. 육갑이라는 말이 나온이유는 다름아닌 바로 갑이 여섯 번이라는 의미이다.
또 六庚이라는 말도 있다. 갑이 여섯이면 경도 여섯일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육경이라는 것은 六庚申과도 서로 통하는 말이다.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도를 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말은 매력적이지만 실제로 성취를 한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여기에서도 경신을 6회 해야 한다는 의미로써 육경신인데, 그렇게 되면 일년동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일년에는 갑자가 6회 반복되기 때문이다. 육임도 이런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중요하게 생각해볼 것은 임수는 수기라고 하는 의미이다. 그냥 물이라고 하기보다는 다른 양간들과 마찬가지로 물의 기운으로 관찰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잠시 연해자평(淵海子平)1)에 보이는 임수의 설명을 인용해본다.
‘임수는 아기를 배는 의미가 있다. 음양이 서로 교류를 이뤄서 비로소 잉태가 이뤄지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볼적에 앞의 辛金으로써 일단 막을 내리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된다.
(2) 물질적인 관점
그러면 구체적으로 임수탐험을 해보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으로 생각을 해볼적에 가장 일반적인 유행의 흐름으로는 호수(湖水)가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바다로 이해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확대해서 강(江)을 떠올리게 되지만, 뭔가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물은 흐르는 물이라고 하는 의미가 강한데, 흐르는 물은 계수라고 하는 의미로써 많이 사용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천의 물을 계수라고 한다면 강물을 임수로 보는 것에는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점이 느껴지는데, 즉 계수의 의미가 생동감이라고 하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바닷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다의 형체도 외형으로는 그냥 출렁거리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쉬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할진데, 단순하게 표면적인 것만으로 단정을 해버리는 것은 뭔가 생각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호수라고 하면 그냥 단지 잔잔하게 고여있는 물의 이미지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비교적 계수와 혼동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임수라고 해보지만 역시 마땅치 않기는 같다고 해야 하겠다. 하다못해 조그만 저수지에서도 물의 흐름이 있는데, 호수인들 어찌 없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과연 물이라고 하는 형태가 임수의 형태겠느냐는 생각이 문득 든다. 즉 임수는 그러한 구체적인,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형태의 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임수는 水氣 그 자체이고 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교과서에서나 간단하게 ‘바다나 호수-임수’로 이해를 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약간 시각을 달리해보도록 하자.
‘잉태(孕胎)’라고 하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의 형태가 발생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 무엇인가가 뱃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안개처럼 이슬처럼 그러한 형태라고 생각을 해보자. 적어도 연해자평에서 생각해본 것이 이정도라면 역시 고인들의 안목은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그냥 강물로 보지않고서 잉태를 하는 의미로 관찰을 했는데, 이것은 앞에서 주욱 설명을 해온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신금에서 수확을 거둔 상태로 종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임수는 다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형태라는 이야기인데,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 착안을 해봐야겠다.
이것을 낭월이는 水氣라는 형태로써 이해를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수기는 만물이 생명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성분이다. 범람하는 물이 아니라 단시 촉촉한 수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수기는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러한 상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마치 병화의 빛과도 어떤 연관성을 생각해볼수 있겠는데, 이 빛이라고 하는 것과 습기(濕氣)라고 하는 것이 서로 어우러지면 생명창조라고 하는 일이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을 해보고 싶다. 즉 수기의 형태를 그나마 체감을 통해서 느껴 볼수 있는 것이 습기일 것으로 생각되어서이다.
일기예보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것을 정리해서 도표로 만들어 봤다. 함께 생각을 해보자.
종 류 |
십 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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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류 |
십 간 |
강수량(降水量) |
癸 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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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 |
辛 金 |
습도(濕度) |
壬 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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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颱風) |
甲 木 |
온도(溫度) |
丁 火 |
|
폭풍(暴風) |
水+木 |
풍속(風速) |
甲 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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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癸 水 |
풍향(風向) |
乙 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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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
戊 土 |
맑음 |
丙 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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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壬 水 |
서리 |
辛 金 |
|
구름 |
癸 水 |
대충 생각이 나는대로 분류를 했는데, 이것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달리 볼수도 있겠다는 이야기이다. 혹 동조를 할 수가 없는 것은 벗님의 생각대로 고쳐서 보셔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임수의 영역을 습기로써 생각해 보자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이 습기에서는 만물이 싹트는 위력이 발생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보자. 대충 이정도로써 임수의 형태를 이해한다고 해도 무난 할것으로 생각된다.
(3) 인간적인 관점
이미 새로운 시작을 향한 준비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손자(孫子)가 떠오를상 싶다. 그렇게도 늙그막이 되면 손자가 그립다. 손자는 새로운 의미로써의 희망이다. 원래는 갑목이 희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갑목은 자신의 희망이었던 것이고, 손자는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마치 고목의 싹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의미에서 손자는 대단히 중요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원래 골목에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야 그 동네는 생기가 있다는 말을 한다. 시골에서 살던 젊은이들이 모두 돈을 쫓아서 서울로 도시로 떠나버리고 시골에는 노인네들만 남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시 도시에서 실망을 한 젊은이들이 시골로 농촌으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속속 찾아오고 있어서 어느사이 전설이 되어버렸지만(아마 머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는 골목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있어서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임수라고 할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러한 기운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렇게 2차적인 희망으로써 뭔가 기대를 갖게 하는 손자는 늙그막에 있어서는 자신의 재생을 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미 자신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깜깜한 전망을 보면서 암울하게 죽어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싫다. 그렇다면 과연 기대를 해볼만 한 것은 없을까? 자식들도 이미 장성을 해서 각기 자신의 일에 몰두를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는 이미 글러버렸다. 그래서 노인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뜨락에서 폴폴 뛰고 노는 손자에게 흐르기 마련이다. 손자녀석에게는 기대를 해보자. 내가 그 끝을 보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손자녀석이 앞으로 나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노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보통상식으로는 이해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집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러한 심리의 바닥을 생각해본 결과, 이러한 추리를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손자를 낳아준 며늘아이는 참으로 귀여운 존재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아들이 나이가 차면 이러한 희망으로 며느리를 맞아 들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은 딸을 둔 노인들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외손자를 귀여워하는 이면에는 약간 다른 심리가 흐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이쁘게 자란 딸이 시가댁에서 남편에게 미움을 받지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안도수표’ 내지는 ‘안전보험’ 정도의 의미가 추가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나서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떤 분야에서 이러한 임수의 특성을 읽을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사회적으로는 종교(宗敎) 분야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온갖 종교들은 항상 미래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희망적으로 때로는 절망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결론은 모두 같다. 나의 종교를 의지하면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이야기가 끼어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느 종교던지 한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것에 대해서 보증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냥 스스로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래서 늘상 하는 소리는 같다. ‘믿으세요~!’ 가 전부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믿어 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그리고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욱 이 종교에 대해서 기대를 걸게 된다. 현재의 삶이 행복한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성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전혀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 형편이 좋아지더라도 그냥 종교를 의지하고 믿음의 생활로 정진하는 사람도 의외로 더러 있어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곤란에 처했을 때 매달리는 마음이, 형편이 좋아지면 서서히 잊어버린다. 낭월이가 종교계에 종사를 하다보니까 이러한 관찰은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운명감정을 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서는 자신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말로는 예언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를 묻지말라고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가 알고 싶어서 파계(破戒)를 하는 셈인데,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이러한 입장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일단 찾아올 적에는 그렇게 묘한 감정으로 오지만 낭월이와 더불어서 천지자연의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점쟁이와 명리학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모양인데, 이것은 흔히 합리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특이한 학문으로 인식을 하고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교단에 종사하는 지도자급의 사람들도 암암리에 이러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물론 낭월이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자신들은 보러 다니면서 자신의 신도에게는 물어보러 다니지 말라고 말하는 이중성이 더 큰 문제이다. 이렇게 자신은 필요로 하면서 신도들에게는 금하려니까 그 마음이 아무래도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이렇게되면 뭔가 꺼림찍 할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마음 한쪽에서는 왠지 개운하지만은 않은 것이 있어서 캥기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융통성이 있는 종교계의 지도자는 ‘방편(方便)2)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면서 자신의 신도들에게 일종의 점술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고 들었다. 불교에 종사하는 스님들도 이러한 당당하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슬쩍슬쩍 신도들의 운명을 봐주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면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이들은 철학원이나 무녀를 찾아서 의논을 하다가는 혹 심성이 불량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라도 하면, 더욱 나쁜 구렁텅이로 빠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부처님의 말씀을 약간 벗어나더라도 근기가 약한 말세중생을 위해서 편법이나마 배워서 올바르게 인도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리고 스님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계통에 종사하는 목사님이나 신부님도 이러한 것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甲子 乙丑을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던지 간에 운명의 미래에 대해서 점을 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도 역시 앞의 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렇게 숨어서 음성적으로 연구를 할 것이 아니라, 기왕지사 버린 몸(?)이라면 당당하게 연구를 하고 올바르게 지도를 해서 보다 정확하고 희망있는 미래제시를 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떳떳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도 감을 잡아가면서 수행을 하고, 신도들의 고민도 보다 합리적으로 연구해서 도움을 줄 수가 있다면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그리 탓만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여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고 방편으로 활용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결론은 이렇게 정신적인 방향에서 희망을 주는 것은 종교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명리학을 종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다시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줄 수가 있다면 구태어 종교가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상담을 하다보면 때로는 종교의 무력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사주팔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 더욱 현실감있게 다가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종교라는 말로 구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명리학도 壬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4) 세계적인 관점
그러면 이번에는 세계적으로 관찰을 해보자. 아무래도 차세대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 나라라고 한다면 티벳이 어떨까 싶다. 티벳은 어린 아이가 통치자로 행동하는 특이한 나라이다. 물론 환생을 한 달라이 라마라고 하지만, 이것을 믿는 사람은 티벳사람들 뿐일런지도 모른다. 나머지의 사람들은 그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매우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서도 그러한 느낌이 든다. 티벳의 종교는 불교이면서도 또 다른 특이한 면이 있는 것이다. 대대로 달라이라마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인 점이 특이한데, 구태어 반드시 현재의 달라이라마가 몸을 버리고서 다음에 태어나면 그 아이가 10세 미만에 고승들이 찾아가서 불러다가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쳐서 전대의 달라이라마라고 인정을 해준다는 것도 세계적으로 유래를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이러한 몇가지를 생각해 볼적에 아무래도 티벳이 영적인 삶에 집착하는 가장 종교적인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임수에 해당한다고 생각해봤다. 그리고 다음생(甲木이 아닌)의 기쁨을 생각하는 인생관도 마찬가지로 임수와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실로 티벳이라고 하는 나라의 환경은 무엇 한가지도 충분하게 갖춰진 것이 없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환경이다 보니까 현실이 과히 즐겁지만은 않은 상황일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오히려 다음생에 더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볼적에 중국(戊土)에게 시달리는 형편인 티벳(壬水)도 결코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롭다. 그렇게 정신적인 지도자의 스승들이 많은 영토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손들이 타국의 지배를 받도록 둔다는 것인지 통 이해가 되지않는다. 물론 말로써야 자손들로 하여금 시련을 겪어서 보다 성숙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말하면 말은 되겠지만, 글쎄다... 아무래도 이유로써는 빈약하다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몇가지 낭월식 관찰법(?)에 의해서 임수라고 결정을 내렸거니와, 벗님께서 이에 반대의견이 있으시다면 보다 타당한 상황을 설정해 보시기 바란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보다 깊이있는 통찰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치적으로 합당하고, 현실적으로 그럴싸하면 취할 수가 있다는 것일 뿐이지, 절대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만약 티벳이 독립을 하고, 삶의 환경이 풍부해진다면 다시 다른 나라를 찾아내야 할런지도 모른다. 어쨌던 현재로써는 비교적 근사(近似)하다는 생각이 든다.
(5) 사주적인 관점
이제 사주에서의 壬水를 관찰해보도록 하자. 우선 임수로 태어난 사람은 웬지 심사숙고하는 형태가 떠오른다. 그렇게 폭넓은 사고력으로 앞뒤를 조용하게 관조하는 여유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종교적인 성향이라고 하는 점에서 원인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항상 유동적(流動的)인 면도 있다. 水氣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이러한 성분은 고정적이지 못하고서 흘러 다니는 물의 특성으로 인해서 한곳에 몰두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것도 같다. 여기에서 다시 잉태라고 하는 의미를 부여해보자. 그러면 항상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는 암시가 나타난다. 이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도 하겠는데, 현실적인 것에 안주를 하기 보다는 그렇게 미래에 대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또 한가지는 대개의 임수로 태어난 사람은 사고방식이 개방되어있는 점이 많이 발견된다. 이말은 옹색하게 한곳으로만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뭐든지 그 원인을 생각해보고 이치를 궁리하는 형태로써 이것이 잘 발전하면 학자의 풍모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력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면에도 해당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도 보다 정신적인 곳에서 더욱 대단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정신적인 공부 방향으로 잘 발달해 있는 사고력인 것 같은데, 이러한 성분을 잘 살리면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가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임수의 특성으로는 누가 앞에 나와서 우쭐대면 못봐주는 점도 있는 경우를 발견한다. 이것은 丙火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숙명적인 암시로써 궁리를 해보는 것인데, 실제로 우쭐대는 사람이 있으면 한마디를 내뱉아서 기를 죽여버리는 일을 곳잘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임수는 병화를 극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올려 본 것이다. 또 한가지 특징이라면 남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항상 자신의 흐름을 유지하고서 냉정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는 냉정한 면모가 느껴지면서 역시 임수는 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은 어디던지 냉정하게 파고들어가는 특징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습기는 물보다도 더욱 치밀할 것이므로 그 사고력은 더욱 유연하다고 보겠다. 즉 물은 아래로만 흐를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습기는 동서남북과 상하에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보다도 더욱 활발한 사고력의 소유자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사주에서 임수의 비중이 적절하게 되어 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임수가 너무 많은 사주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세력이 넘쳐날 것같다. 이러한 상황을 적천수에서는 ‘천지를 휩쓸고 다닌다’는 말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충천분지(沖天奔地)라고 하는 말로 되어있는데, 이 의미가 하늘이고 땅이고 가리지 않고서 흘러다닌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임수의 특징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충천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임수를 그냥 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충천이라는 말은 전혀 해당이 없는 말이 된다. 즉 물이 하늘로 부딧쳐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신 유백온 님의 의사는 과연 무엇일까? 임수의 구조는 습기라고 하는 형태라는 것의 암시가 아닐까?
어쨌던 임수가 너무 강하면 이렇게 휩쓸고 다니는 암시가 되고, 이것은 불이든 흙이든 나무든 뭐든지 모조리 쓸어버린다는 의미도 포함이 된다. 이말은 새로운 이치로 묵은 사상을 휩쓸어 버릴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을 확대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너무 강한 임수가 뭔가 일을 내려고 마음을 먹으면 큰 일을 내기는 내는 모양이다.
그러면 반면에 약한 임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약하다는 것은 세력을 잃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보나마나 자신의 의사는 속으로 숨겨두고서 외부의 영향에 따를 것이다. 마치 티벳의 지도자가 인도로 망명을 다니는 것과도 흡사하다고 하겠다. 휩쓸고 다니고 싶겠지만, 세력이 너무나 허약하니 도리없이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본래의 임수가 갖는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 셈이다. 그냥 속으로만 품고 있을 뿐이고 표면적으로는 도리없이 이끌려 다니려니 따분하겠다. 천하의 임수가 말이다.
아무리 마음으로야 그렇다고 해도 환경의 영향은 또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임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원래가 약한 물은 혼자서 흘러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힘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흘러가는 것이다. 임수가 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물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수기의 행동하는 것를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미뤄서 짐작한다고 하거니와 세상에는 미뤄서 짐작을 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대단히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모두 미뤄서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주의 끝에 대해서도 아직 알 수가 없으므로 그냥 미뤄서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고, 사람이라면 지대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저승이지만 그 곳에 대한 자료가 없으니까 도리없이 그냥 미뤄서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은 자료를 놓고서도 미뤄서 짐작을 하다 보니까 해석이 제각각이 되는 것은 또한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다음 세상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도 각기 미뤄서 짐작을 하고 있지만, 결과는 있다는 쪽과 없다는 쪽으로 갈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 추구하는 방식은 결국 자신의 안목 만큼으로 기준을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보다 근사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확인하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로 임수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 하거니와 이러한 자료를 힌트삼아서 보다 완벽한 답을 얻어내시기 바란다.
1) 자평명리서의 고전으로써 고전적인 이론서이다. 비교적 종합되어진 내용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론적으로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높은 견해가 돋보인다. 후세의 모든 이론들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2) 원칙에서는 약간 어긋나지만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활용하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막기 위해서 ‘거짓말하면 혀에 뿔이 난다’는 식도 일종의 방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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