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명리학의 신화적 존재 박도사(霽山 朴宰顯)
--제산 박재현 선생의 생가방문기--
(2011.9.12. 추석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2011년의 추석날, 고향산천 아침은 언제나 낙동의
江 청취가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강가 암바위에 앉아 있노니 옛날의 그림자들이
주마등 되어 지나고 세월의 무상함과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화두가 사그라 들지를
앉는다.
인생무상, 佛, 無, 象이 없는 변화의 그림자, 易.., 이러다가 추석이 앉아서 보내지면
안되지, 반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선조들이 계시는 선산으로 가 배례하고,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돌보며, 먼저 간 작은 형의 산소를 둘러 보았다. 이 형은 언제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형이다. 허!
산을 내려와 함양 上林으로 차를 몰았다. 風流道의 최치원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신동으로 태어난 선생은 당나라 유학에서 천하에 학풍을 날리고 돌아와 여기 함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물 범람의 방제를 위해 이 상림에 나무를 심고 벌레가 생기면 내가
저 세상으로 간 것으로 알라는 말씀을 남기고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신선으로
천화(天化)했다는 전설이 있다. 벌레들이 있나 없나를 살폈더니 벌레들이 있었다.
천화한 신선이다!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사상을 풍류도(風流之道)라고
했다. 조의선사, 화랑도, 선비정신이 아우러진 風流道일 것이다.
나는 신선도(神仙道)라 하지만.,
上林을 중앙 숲길로 빠짐없이 걸어 내려와 현대 명리의 신화적인 존재
박도사(제산 박재현)를 만나러 떠났다. 서상IC에서 물었더니 추석을 당직하는
남자의 검표원은 몰랐다. 관광 안내지를 받아 차를 옆에 대고 면사무소로 전화를 했다.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439번지라고 했다.
면직원이 알려준대로 차를 몰고 가 박도사(제산 박재현) 생가와 웅장하게 지어놓은
서당(덕운정사) 앞에 주차를 하고 둘러 보았다. 생가에는 동네 어른 말씀대로
박도사(제산 박재현)의 부인(전씨, 2011년 73세)이 살고 있었는데 부산 아들집에
추석을 쉬러 가고 없었다.
묵례하고 사들고 간 과일박스를 처마 밑에 내려 놓고 생가를 한방 찍었다. 그리고
서당, 몇 바퀴를 도는데 문이 잠겨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관리를 하고 있는 처남되는
분이 한참 후에 오더니 어디서 왔느냐, 서울서 왔다. 뭐 하러 왔느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박도사(제산 박재현)의 理氣法이다로 인사를 나눈 후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들어가 한참 서당(덕운정사)을 둘러 보면서 사진을 다섯방 찍었다.
서당 잔듸에 앉아 명상에 젖어 仙道를 닦는 지리산 산사의 정좌한
박도사(제산 박재현)을 보았다. 함양군 마천면 백운암이다. 여기서 잊지 못하는
사부인 청허선사에게 10년동안 道學 사사를 받았다. 금강경 화엄경을 읽고 물을
관하며 소리에 집중하는 능엄경의 개운조사파의 맥으로 소리에 심취했다.
최치원선생 선도(풍류도)의 후예들이다. 명리를 달통후 격물치지로 세상을 헤아리며
山에서 수행을 하고 道를 닦아 인간적인
역학인이 되라고 우라부락한 얼굴로 힘차게 강조하고 있었다. 명리학에 道學을
접목시키기 위해 구령삼정주(도교의 주문)를 읊고 있었다. 주문이란 신선이
되기 위해 神들을 설득하는 소리란다.
벽곡, 도인을 거쳐 우뢰(震)의 神, 소리를 숭배하였나 보다. 거기서 영성이
계발되고 눈이 밝아져 훤히 볼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격국을 무시하고 용신보다
희신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주의 흐름을 중시했을까? 이 암자에서 山寺에 전수되어
오는 수장법을 익힌 것일까? 理氣를 논하며 포태를 돌리고 간지의 합충을 충합시키며
래방객의 찾아온 시간에 五行을 대입하면서 선제기압으로 찔러대는 낙화법을
달통했을까? 또 六爻와 닮은 월령도는? 월령도는 여수 문둥이 술사보다 나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명상은 한이 없었다.
여기 서당인 덕운정사에도 장서가 없었고 자료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대포만 거나하게
한대포 했을 뿐 박도사(제산 박재현) 친필간명지도 감정을 할 수 없었다. 월령도, 이기법,
마야법, 낙화법, 수장법, 등 비법들을 실제로 몹시 보고 싶었고, 박도사(제산 박재현)
친필간명지도 감정을 해 보고 싶었던 거다. 하기사 책 한권 안 남기고 자료도 없기로,
그리고 제자를 안 남긴 그분의 성격 아닌가. 동네 중년되는 분의 말씀(필자와 거나하게
한대포 하면서), 초등학교 동창회도 딱 한번 나가고 일체 동네와 지역을 위해 일을 보신
게 없단다. 그 많이 벌은 돈도 이 서당(덕운정사)을 짖는 외에 친인척에게 나눠 준
사실도 없다. 한번 봐 주는데 크게는 집 한채 값이었다는데 좀 쓰시지 참...,
식신생재 편재성이라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한 씀씀이는 컸었던가 보다. 박정희 維新시절에
幽神이라는 간명을 해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 때 잘 봐주던 사람의 빚보증으로
훗날 말년에 빚보증 문제로 심하게 시달렸다. 술과 줄담배로 식사를 안하시는 대꼬챙이의
성미이시라 몸이 허약했고 병고(중풍)를 앓다가 돌아 가셨단다. 일설에는 뒷산인 극락산
을해명당에 할아버지가 묘를 썼는데 저수지 둑을 官에서 파내어 同氣感應으로 중풍을
얻었다고 하고, 덕운정사를 노년에 무리하게 공사하느라 풍을 맞았다고도 한다.
壬午대운에 午火가 월령 子水를 자오상충으로 그만 졸했으리라. 천하의 명인달사인
박도사(제산 박재현)께서도 생로병사의 윤회는 벗어날 수 없었던가 보다. 막걸리 한잔
부어드리고 배례라도 올리고 가야 하는데 방문들이 잠겨 있어 방문틈으로 들여다 보는
아쉬움만 남길 뿐 어쩔 수가 없었다. 장서! 자료! 없었다. 아쉽지만 다시 훗날 내려 와
부인과 부산의 아드님, 서울의 동생분을 만나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장서들 몇권이 진본인가,
짜가인가도 가려 보리라 생각하면서 옥산리를 떠나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황혼길을 달려 올랐다. 허무했다. 니힐(nihil)리야, 니힐(nihil)리야....,
-- 박도사 사주 --
-1935년 11월 22일 기유시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439번지에서 출생하다. 호는 제산, 필명 박재현, 이름은 박병태, 진주농고를 다니다 다리 부상으로 고향집에서 장기간 치료 후 가까운 거창농고를 졸업하다. 지리산 백운암(함양군 마천면)에서 청허선사(윤일봉)를 은사로 구령삼정주를 수도하며 불교 도학적 영성을 수행해 명리학에 접목을 시키다. 계룡산에서 仙佛家眞修語錄(백운산인 청허선사 저)을 발행하다. 2000년 중풍으로 귀천하다.
*, 청허선사는 윤일봉이라는 사람으로 함양군 함양읍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道를 닦는 수도를 하였고 그 道가 무르익을 무렵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생활을 하면서 수행해 道를 이뤄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도인이었다.
--필자는 저 지난해(2011..9.12) 추석날 제산(霽山)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진--
(첫번째-생가, 두,세,네번째-덕운정사 서당)
(필자-친필간명지를 확인하면서)
--사주간명--
乙亥생 돼지띠가 추운 엄동설한 子월의 초저녁 酉시에 촛불과 같은 丁火의 기운으로 태어났다. 일간 丁火는 수극화(子)로 실령하여 卯木에 의지하려 하나, 卯酉로 상충하여 의지하기 어렵고, 멀이 있는 乙木은 亥水에 앉아 生을 받으나 戊土에 剋으로 가로 막혀 丁火를 도울 木氣가 겨울 동지 자수의 차가운 물살에 얼어 붙어 불기운 일간 丁火를 도울 수가 없다.
월령에서 壬水가 사령하고 지지에 金水가 강하니 관살 水의 위협으로부터 丁火를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子水의 찬 겨울 동지바람을 가로 막아주는 戊土가 지지의 관살인 水氣를 제극해 일간 丁火가 보호된다. 상관제살격으로 戊土를 용하여 화생토 토극수한다.
상관제살격으로 머리는 영리하고 박학다식하나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규율과 법질서를 무서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으로 능히 상대를 제압하려 하고 일찌기 비상함으로 낭인처럼 이리 저리 떠돌며 공부하고 산사에서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도를 통했다고 한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의 대화로 상대를 제압하여 상관제살의 위력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丁火는 추운 겨울 초저녁에 촛불과 같이 추위를 녹이고 초저녁 어둠이 깔리는 밤을 밝히듯이 세상을 밝히는 촛불, 달빛과 같은 형상으로 만인의 등불이 되는 象을 가졌기에 래방객에게 속시원하게 갈 길을 제시해 주었으며, 상관이 관살을 제압하고 있으니 고관대작의 사람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그들을 상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산(霽山)선생이 역학을 하지 않았으면 암흑세계의 큰 보스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박대통령이 함양군수를 하라고 해도 사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것들은 상관의 속성이다. 제산(霽山)선생은 일생을 역학과 도학에 심취했으며 대기업체의 인사에도 참여했었고 국사의 대사결정에도 조언을 했다고 한다.
卯酉가 상충하니 처자식운이 좋지 못하여 가정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해 평생을 떠돌며 살았고, 子卯형살로 卯편인이 부서지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빚보증을 섰으며, 시지의 편재 酉金이 卯酉로 상충하니 본인 명의로 재산을 지니지 못하고 부인이 재산관리를 했다. 시주에 식신 己土가 酉金을 식신생재하여 많은 재물을 거둬들였으나 문서운 卯木과 편재 酉金이 상충하여 깨어지니 타인의 빚보증으로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박정희 維新시절 담배갑에 幽神이라고 써 정보부에서 고통을 당할 때 잘 봐준 사람의 빚보증을 서 후일 말년에 그 보증빛으로 시달렸음).
중년이후에는 부산의 수영초등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하루에도 많게는 40명을 무리하게 감명했다. 친하게 지냈던 노개식선생이 부산의 제산(霽山)선생을 찾아 가 "이제 그만 일선에서 물러나서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는게 어떠 하느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노개식선생은 남원군 인월면에서 한약방을 하였는데 제산(霽山)선생이 자주 찾아가 기숙을 했다. 여기서 격물치지로 역술을 발휘해 노개식선생을 놀라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평소에 친하게 지냈다.
그 후에 제산(霽山)선생은 부산생활을 접고 고향에 제자양성을 위하여 큰 규모의 서당인 덕운정사를 웅장하게 세우면서 고생했다(위에 있는 사진에서 1번째는 생가, 2,3,4번째가 덕운정사이다). 힘든 서당을 지으면서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
환갑인 壬午대운의 乙亥년에 갑자기 중풍이라는 질병을 얻어서 7년을 고생하다가, 辛巳대운의 2000년 辛巳년 丁酉월 壬午일(음력 7월 29일)에 졸하다. 대운 午火가 월령의 왕수인 子水를 상충하여 중풍이 오고, 대운인 辛金은 편재로 乙木을 상충하고 일간 丁火의 빛을 흐리게 하며, 丁酉월의 酉金이 일지와 卯酉로 상충하고, 壬午일의 壬水가 일간 丁火를 합하여 묶으며(기반), 午火가 월령 子水를 상충하니 그만 졸했으리라.
일설에 의하면 제산(霽山)선생이 발병한 그 해에 官에서 고향 乙海저수지에 포크레인으로 준설공사를 하면서 저수지 둑을 절개해서 중풍이라는 병이 왔다고도 한다. 乙亥명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분인데 그 명당의 氣가 흐르는 저수지를 절개하였으니 발병한(同氣感應) 것이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풍수지리).
67세라는 비교적 아쉬운 나이에 제자육성도 하지 않고, 그의 박학다식한 학문을 저서 등으로 남기지 못하고 가신 것은 많은 역학자들이 대단히 아쉬워 하는 대목이다. 근현대 한국 역학계에서는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우리 명리계의 특출한 역학인이고 기인달사의 도인이라고 우리들은 칭송하면서 그를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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